블로그 이미지
내가 만약 누군가의 마음의 상처를 막을 수 있다면, 내가 만약 한 생명의 고통을 덜고 기진 맥진해서 떨어지는 울새 한 마리를 다시 둥지에 올려놓을 수 있다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속삭임과그대

태그목록

공지사항

최근에 받은 트랙백

글 보관함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아홉살 소년의 눈으로 바라보다 - 아홉살 인생

2012.02.07 04:07 | Posted by 속삭임과그대

아홉살 소년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투명하다. 투명하지 않은 것도 투명하게여과시켜서 바라볼 있는 여민이가 자랑스럽기만 하다. 물론 어디까지나 만들어진 가공의 인물의 시각 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시각을 공유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끼고 있는 안경의 색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낄 있었다. 색이 흐릿해진다고 해서 투명해질 수는 없겠지만 흐릿해진 렌즈사이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여민이의 눈에 보이는 많은 등장인물들은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한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속성이기 때문에 주인공 여민이 조차도 고뇌에서 자유로울 없다. 아마도아홉이라는 숫자는 향해가는 시간의 연속선상에서 과도기의 역할을 하는 시점이기 때문에 스물아홉의 작가가 서른을 향해가는 시점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있을 것이다. 현실을 넘어서서 다른 현실을 동경하게 되는 시점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살이 되었다. 그래서...라고 여운을 남기는 이유..?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 그것은 어느 울타리에 갇혀 있지 않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자신을 관조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여민이에게 비춰진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자극이 되어 독자의 이면에 있는 많은 면들을 투사시킬 있을 비로써 가능해진다. 가장 불쌍해 보이는 사람도, 가장 슬퍼 보이는 사람도, 가장 아이러니해 보이는 사람도, 가장 고상해 보이는 사람도, 모두 우리의 그림자 뿐이다.

 

우리는 그림자들의조화 추구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울고, 웃고, 슬퍼하고, 좌절하고, 희망차고, 기쁘다. 하지만 추구해야 한다는 것과 추구할 있다는 것만이 중요할 . 순간, 순간에 느낄 있는 것들은 모두 중요하지 않다. 그것들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일부이고, 과정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9 때도, 19 때도, 29 때도, 39 때도, 49 때도 생의 마지막 아홉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삶의 방향성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아홉 살에 울타리를 치고 싶은 생각은 결코 없다. 인생은 아홉 살에서 끝날 아니므로, 그리하여 우리는 또다시 인생 이야기를 흥미진진한 목소리로 꺼낼 있는 것이다. 
 

 

 

 

선과 악의 공존에 대하여 - 지킬 박사와 하이드

2012.02.03 03:19 | Posted by 속삭임과그대

선과 악.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그것.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지만 그것의 경계선은 불분명하다. 그 경계선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환경과 학습의 영향이라고 말한다.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자아와 본능을 주관하는 초자아의 영향이라고 주장했으며 그 초자아는 부모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성장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간다고 말했다. 그것은 동양권에서 성악설로 불리는 사상과 동일한 맥락을 갖는다. 그것은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따른 학습에 의해 본능에 내재되어 있는 악한 면을 억압당하고 그와 반대되는 선한 면은 사회적으로 계속 지지받고 강화 받음으로써 더 의식화되고, 표면화된다는 것이다.

지킬박사도 악한 자신의 본능을 억압하고 선한 면을 최대한 부각시키고 표면화 시키면서 살아온 인간이었다. 그는 자신의 덕망과 명성을 중요시했으며 그에 부합되지 않는 악한 면을 볼 때면 심한 괴리감을 느끼고 그것에서 해방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는 쾌락을 중요시여기고 자신의 본능을 억압하는 것에 심한 불안을 느꼈기 때문에 죄책감이나 괴리감이 없이 자신의 악한본능을 들어내면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한다. 그래서 신비한 약을 발명했으며 그 약을 먹은 후에 변신한 자아를 하이드라 불렀다. 하이드는 그의 내면에 있는 10%정도에 지나지 않는 악한 면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100%악으로만 이루어진 악의 결정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다. 결국 지킬박사는 자신의 이중적인 면이 주는 고통에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에 의해 자신의 삶을 파멸시킨다.

누구나 한번쯤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악한 면을 알게 되고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자아가 분리되는 심한 괴리감을 경험할 것이다. 나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될 때면 내 자신의 성향이 아닌 주어진 상황에 귀인 시켜 나의 입장을 합리화시키거나 또 다른 나의 모습이 아닌 마치 다른 사람의 모습인양 부인하고 인정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나의 잘못을 반성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내 안에 악하지 않은 선이라고 불릴 수 있는 면도 공존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하지만 악한 면만이 분리되어서 만들어진 하이드에게 '반성'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 된다. 그는 오로지 악에 대해 알 뿐 선에 대한 개념도 인식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를 보는 많은 사람들은 그를 알 수 없는 불쾌감과 소름끼치는 공포감의 대명사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닌 인간에 의해 발명된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악의 결정체인 인간이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 그것은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이중적인 모습을 정당화시켜주고, 오히려 그것이 완벽한 것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만약 지킬박사가 지나치게 한쪽방향만을 추구하는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버리고, 보통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자신에게 내재되어있는 이중성을 인정하면서 조율을 추구했다면 스스로가 독약을 먹고 목숨을 끊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가 가진 욕망은 인간의 본능에 대한 도전이었지만 그의 도전이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상이다. 우리의 이중적인 본능을 조율하지 않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만든다면, 그것은 ' 반성의 부재'를 낳게 되고, 결국 우리의 삶을 파멸로 이끌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인간은 선과 악이 내재된 이중성적인 모습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을 조율하기위해 끊임없이 반성하는 인간만이 완벽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가게에서 팔잖아. 팔지 않는 카스테라는 없다고. 당신은 생각할 것이다. 살 수 없는 카스테라는 없다고, 예전에 내가 생각했듯이. 결국 나는, 이 시시한 논리를 시시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 한 조각의 카스테라를 스스로 만들어 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계란과 밀가루를 반죽해 빛이 나올 때까지- 하다못해,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 P 331, 작가의 말 中

모든 물건에는 가격이 있고, 물건은 팔려고 만든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몸담고 계신 시장판에서 눈동냥하면서 알게 된 것은 싸게 사들이고 비싸게 팔아치우는 행위가 남는 장사라는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시장의 규칙이다. 그러나 박민규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 대단한 생존의 규칙이 정말 언짢고 시시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작가의 말 중에서 저 다섯줄을 읽고, 넋을 놓고 허공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에게도 오븐과 계란과 설탕과 밀가루가 있는데…….

같은 지구에서 같은 규칙을 가지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어쩌면 비슷한 재료를 가지고자신의 카스테라를 오븐 밖으로 선보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면서 살아간다. 그 노력의 근원은 원초적인 본능을 바탕으로 ‘시장’의 흐름과 규칙에서 도태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시장’에 대한 악담을 퍼 붓는 사람을 훈계하면서 시장을 찬양하고, 개인의 자유와 사회 계약이라는 관념을 ‘시장’과 불가분의 관계로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우리가 ‘시장’을 끌어안고 있는 덕분에 우리는 때로는 자신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변신’을 해야 하는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그것이 너무도 당연하다며!

하지만 당연한 것은 위험하다.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구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도 평범하고, 누구나 다 만들 수 있는 카스테라를 만든다면, 그것만큼 위험한 것이 있겠는가? 그래서 저자는 당연한 것을 회피하고, 보편적인 것과 평범한 것을 거부한다. 그의 문체가 그렇고, 그의 사고가 그렇고, 그의 생활이 그렇다. 그것은 마치 세계 최고의 빵집을 운영한다는 푸알 랜이 기존의 제빵사 들을 채용하지 않는 대신 기꺼이 몇 년씩 그의 도제가 되겠다는 청년들을 고용하는 것과 흡사하다. 어쩌면 그는 에디슨의 카스테라, 가가린의 카스테라, 지미 핸드릭스의 카스테라, 이백의 카스테라, 제인 구달의 카스테라, 테레사의 카스테라가 탄생을 찬양하고, 기억하며, 그것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카스테라를 만들 수 있기를 소망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인류를 위해서가 아닌(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된다고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무언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것은 반드시 이유가 있다. 당연히 그렇다. 하지만 우리가 형편없는 카스테라를 만들었다면 그 실패에 대한 비난은 쏟아지겠지만 그것은 우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카스테라를 만들어내는 요리법(일종의 아이디어)에 대한 비난이다. 그런 비난을 회피하든, 부인하든, 합리화 시키든,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지만, 그런 비난이 또 하나의 요리법을 탄생시킬 수 있는 배경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맛있는 카스테라를 탄생시킨 또 하나의 재료가 되지 않겠는가? 그것이 작가 박민규 만이 소유하고 있었던 특이한 재료 중에 하나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부여한 과제를 이렇게 생각해 주길 바란다. '누구나 만들 수 있는 흔해 빠진 카스테라가 아닌,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살 수 없었던, 단 하나의 위대한(의미있는) 카스테라의 탄생을 위하여! ' 라고..

 

"시간의 다층성을 이해하자!"

지난 칼럼
(3번째)에서 순간의 소중함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 글을 통해 아이들에게 순간의 소중함을 알게 해주려면, 처음이자 마지막인 찰나의 순간의 연속선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조금 더 의미 있는 방법으로 알려줄 필요가 있으며 시간을 조작하고 선택하는 기회를 주어야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선택에 대해서 상당히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선택하는 것은 못 하게 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선택하기보다 주어진 일에 충실하려고 하며, 자신의 선택보다 무조건 주변 사람들의 선택이 옳다고 여기기도 한다. 심지어 자신이 스스로 선택했을 때는 안 좋은 결과나 부정적인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2번째 칼럼에서는 아이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고, 아이에게 선택할 기회를 줄 것을 권했다. 부모의 입장에서 원하는 바가 있다면 나 대화법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감정과 생각을 전달하려고 노력하되 강요하거나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따라주길 바라지는 말자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에게 기회를 주고, 스스로 선택하도록 해도 오랜 시간 선택으로부터 무력감을 느껴왔던 아이들이 무모의 간섭이 줄었다고 스스로 자발적으로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택을 하기 전에 그것의 중요성을 알고 충분히 고민하지 않고, 충동적으로 원하는 것을 하고자 한다면 오히려 스스로 선택 하도록 한 것이 골치 아픈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자발적인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기 전에 선택의 중요성을 이해시킬 필요가 있다. 인생은 B(birth)로 시작해서 D(death)로 끝난다. 그리고 그 중간 과정에는 C(choice)가 있다고 한다. 그것을 통해 모든 인간은 태어나서 언젠가는 죽기에 태어남과 죽음의 모습은 정해져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같은 결과의 삶이라도 그 모습은 철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이해시킬 수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일직선 의 시작을 B로 마지막은 D로 그리고 그 범주에 C를 넣어 표시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선택의 중요성을 이해시킬 수는 없다. 그들은 그건 너무 당연하잖아요. 그래서 어쩌라고요?’라는 표정으로 바라볼 것이다. 그럴 때, 난 이렇게 설명한다.

넌 지금 선생님과 상담을 하고 있지?”

이곳에 오는 것을 자의든 타의든, 넌 선택한 거야. 그렇지?”

그렇죠.”

만약 네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어디에 있을까?”

친구 만났겠죠.”

그래. 하지만 지금 넌 여기 있지. 왜냐면, 우리는 한 순간에 하나의 선택밖에 할 수 없거든.”

알아요.”

그래서 선택은 하나의 시간대로 들어서는 길이기도 해.”

무슨 말이에요?”

네가 친구를 만났다면,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을 지금과 전혀 다를 수도 있거든. 너의 생각과 느낌은 지금과 전혀 다를 테고, 그 행동으로 인해 생기는 결과들도 지금과 전혀 다를 거야. 그렇지?”

그렇겠죠. 다른 경험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래. 그래서 다른 시간대에 존재한다는 거야. 그 시간은 어쩌면 지금의 시간대와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 될 수도 있겠지. 연속적으로 다른 결과가 이어진다면 말이야.”

우리의 삶에서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르지만 다양한 시간대는 존재할 수 있다. 루이스 보르헤스는 그것을 시간의 다층성이라 했다. 시간의 다층성은 우리의 선택은 다른 결과를 낳는 것에 지나지 않고, 다른 시간대에 우리를 존재하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영화 [나비효과]에서는 주인공이 초능력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여 시간의 다층성을 설명한다. 과거의 한 시점으로 돌아갈 수 있는 초능력을 지닌 주인공은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한다. 그런데 한 순간에 하나의 선택을 바꾼 결과, 주인공의 삶의 모습은 철차만별로 달라진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과 수많은 변수가 얽히고설켜 전혀 만날 수 없는 시간대에 우리를 존재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 하나의 선택은 우리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을 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원하는 목표나 지향점을 향하도록 하는 것은 대단하고 결정적인 계기보다 매 순간 하게 되는 소소한 선택의 연속의 흐름과 연관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택의 중요성을 자녀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은 꼭 필요하다. 하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선택은 소중하다.”,“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구태의연한 말보다 영화 [나비효과][소스코드]를 통해 시간의 다층성을 이해시키고, 선택이 단순히 다른 결과물을 가져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도록 해준다는 것을 알려줄 것을 추천한다. 영화 속 사례와 부모와의 진심어린 대화가 그들에게 선택의 중요성을 느끼게 하고, ‘선택에 대한 동기를 부여할 것이다.

 

"순간의 소중함을 알도록 하라!"


아이의 학습과 관련하여 가장 부모들이 고민하는 문제가 다름 아닌 시간관리머리도 나쁘지 않고가능성도 있어 보이는 아이가 학습하는 시간을 조율하지 못 하면 당연히 좋은 성적을 받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다죽이 되던 밥이 되던우선 공부를 해야 하는데아이들이 학원을 다녀오면 집에 와서 놀고쉴 생각만 하지 더 이상 공부할 시간을 따로 내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부모들이 많다.

그럴 경우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시간의 소중함을 알려주기 위해 노력한다. “시간은 금이다.”,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무조건 시간을 늘려 노력해야 한다.”, “계획표를 세워서 시간을 관리하자” 사실 그런 말들이 틀린 말은 아니다하지만 문제는 아이들의 마음에 와 닿지 않는 다는 것이다다 알고 있는 이야기구태의연한 이야기는 오히려 잔소리처럼 느껴지기 쉽다아이들은 아마 속으로 이렇게 소리치고 싶을 것이다. “알아요시간이 중요한건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고요!”라고.

이제 구태의연한 말을 줄이고아이가 정말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우리가 새롭게 맞이하는 순간순간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조금 다른 방법으로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자그럼우선 생각해보자아이들은 왜 순간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 하는가그리고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자과연 나는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보내고 있는가사실 어른들은 스스로도 몸소 깨닫고 실천하지 못 하는 것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시간이 되돌릴 수 없고순간순간이 찰나에 스쳐 지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매 순간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지는 못 한다그 이유는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떤 패턴을 가지고 생활하기 때문이다우리는 정해진 시간에 동일한 일을 반복하며 살아간다하루 24시간을 비슷한 일을 동일하게 반복하면서 지내보라다람쥐 쳇바퀴 돌듯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착각이 들기 마련이다그것은 우리의 생각 뿐 아니라 우리의 감각도 동일한 패턴에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아이들 또한 어떠한가학교--학원-이라는 동일한 패턴으로 동일한 장소에서 비슷한 행동을 반복적으로 수행한다그런 생활을 하면서 순간순간이 새롭다는 것을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더군다나 집에 와서는 엄마가 짜준 계획표에 맞춰서 숙제복습예습을 병행하기까지 한다면정말 틀에 박힌 일상의 반복 아닌가아이들 또한 그런 생활에 익숙해지면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알지만 시간이 흐르는 것의 의미를 깨닫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시간의 소중함순간의 소중함을 어떻게 깨닫게 할 것인가나는 이 방법을 택했다낱개로 포장되어 있는 과자를 준비한다그리고 과자를 먹도록 유도한 다음 이렇게 묻는다.

선생님이 이제 신기한 사실을 알려줄게우리는 세상에서 누구도 경험하지 못 한 것을 처음으로 경험할게 될꺼야그리고 그것은 앞으로 그 누구도 볼 수 없고경험할 수 없게 될꺼야.”

뭔데요?” (어리둥절해 하며 과자를 먹는다)

넌 이 과자를 먹어 본 적이 있니비슷한 과자를 먹어 본 적은 있겠지만이 과자는 세상에서 유일해그렇지그리고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과자를 먹어 본 적은 없겠지?”

앞으로 이 세상의 누군가가 지금 이런 상황을 똑같이 경험할 수 있을까?”

아뇨.”

그렇다면 너에게 지금 이 순간처럼 과자를 먹는 순간이 또 올까?”

비슷한 거 사먹죠..”

비슷한 과자를 먹을 수는 있지만 그 과자는 지금 이 과자가 아니겠지그리고 그 순간너가 과자를 먹는 시간은 지금과 같을 수 없어.”

그렇죠시간은 흐르니까...”

비단 과자를 먹는 것만 그럴까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야시간을 되돌릴 수 없지우리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순간의 연속선에서 살아가고 있는거지..”

그래서요?”

평소에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있니매 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유일한 순간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야.”

비슷비슷 하잖아요일상은..”

비슷할 뿐이지. 100% 일치하는 상황은 단 한 순간도 없어그래서 선생님은 네가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았으면 좋겠다.”

구태의연한 말보다 한 번의 행위를 통해 아이들이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그리고 순간순간이 우리들에게 어떤 선택을 하도록 하며 그 선택으로 인해 우리의 삶의 모습을 굉장히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시킨다면 더욱더 좋을 것이다.
(
다음 칼럼에 구체적으로 다룰 예정

 

생각의 단상- 함께 비를 맞는 일

2012.01.31 09:57 | Posted by 속삭임과그대

남을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

장영희 교수님은 에세이에서 이 말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했다. 우산을 들어주면 둘 다 조금씩이라도 비를 피할 텐데 왜 멀쩡한 우산을 두고 함께 비를 맞아야 하냐는 것이다. 예전에는 그 생각이 공감했었다.

그런데 누군가를 상담하는 일을 하다 보니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 그래서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에 우산을 들어주는 것 보다 함께 비를 맞으며 그 사람의 아픔과 상처를 함께 느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그리고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천일의 약속]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왔다.

 니들에게는 걱정이겠지. 나만큼 절실해? 나만큼 절망적이야? 나만큼 무서워?”

사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누군가의 아픔과 상처의 깊이를 가늠하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할지라도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것을 똑같이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인 경우는 더욱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픔과 상처를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비슷한 아픔과 상처를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간혹 내가 그들에게 해주는 말들이 그들에게 하는 것인지 지난 시절 나에게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어쩌면 난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돌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할지라도, 나의 공감, 나의 진심, 나의 이해가 그들에게도 진정으로 도움이 되길 바란다. 내가 그들의 아픔과 상처를 모두 끌어 안아줄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함께 아파하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생각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나는 그들의 우산을 들어주는 것보다 함께 비를 맞는 길을 택하겠다. 그것이 비록 힘들고 고단한 길이 될지라도....


 

'생각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각의 단상- 함께 비를 맞는 일  (0) 2012.01.31
뫼비우스의 띠 = 삶의 과정  (0) 2012.01.27

사랑은 어느 날, 문득, 불현듯, 그렇게- 만추

2012.01.30 03:00 | Posted by 속삭임과그대

평화로워 보이는 거리, 시선을 고정하지 못 한 채 퀭한 눈빛의 흔들거리는 한 여인, 그녀가 이상(異常)’을 감지했을 때, 그 때는 이미 모든 것이 일어난 후였다. 불현듯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 그녀의 인생의 적색신호는 옛사랑에 대한 작은 흔들림에서 돌이킬 수 없는 죄악으로 번져버렸다. 치명적인 매력으로 여심을 흔드는 한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 그녀는 희망도, 미래도, 웃음도, 사랑도, 그 모든 것이 허락되지 않는 죄인이었다. 불현듯 그렇게 파국이 닥쳤고, 불현듯 그렇게 사랑이 찾아왔다. 그들은 각본 없는 영화의 주인공처럼,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지, 아무런 예측도 대책도 강구할 수 없는, 한 없이 나약하고 가련한 처지에 놓였다.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

 

살면서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주고받은 상처는 그들만이 이해할 수 있다. 맥락과 상황에 대해 모두 이해한다고 해도, 3자의 입장에서는 유치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남들의 상처다. 그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없고, 그 어떤 글로도 전할 수 없지만, 그는 그녀의 상처를 이해한다. 뿐만 아니라, 그녀도 할 수 없었던 상처의 언어를 구사한다. 치명적인 그의 매력은 근육질 몸매도, 화려한 테크닉도, 마음을 사로잡는 언어도 아닌, 바로 누군가의 상처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감싸 안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그는 마치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사람처럼, 혹은 모든 상처를 다 통달한 사람처럼, 재고 따지고 계산하려 들지 않고,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스스럼없이 내 놓는다

 



나 이거랑 비슷한 거 아주 많아요가져요.” 

그가 가진 것은 비단 물건이 아니라
, 진심으로 상대를 위하는 마음의 조각이었으리라. 흔히 누군가에게 나눠줄 마음의 조각이 많은 이들은 카사노바혹은 바람둥이라는 평을 받는다. 11처제의 사회적 관습과 규범의 범주 안에서는 여러 사람에게 마음을 나눠주고, 여러 사람을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것은 문제로 간주된다. 그리고 그 마음의 출처는 관점에 따라 이타심이 되기도 하고, 이기심이 되기도 한다. 만약 누군가에게 어떤 대가를 바라고, 마음을 나눠주는 것이라면 그 출처는 이기심이 될 것이다. 여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그의 마음을 순수하고 선한 이타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그가 누군가의 아픔 혹은 상처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임은 분명하다. 그것은 분명 여심을 사로잡는 치명적인 매력이었다.



 우리 나오는 날, 다시 만날까요? 이곳에서..”


지킬 수 없는 약속
. 전할 수 없는 마음. 소유할 수 없는 사랑. 그들의 기억 속에 안개처럼 뿌옇게 흐려져 버린, 온몸의 전율을 느끼게 했던 키스의 장소.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는 그녀. 그리고 나타나지 않는, 아니 올 수 없는 그에게 건네는 수줍은 인사.
 

 안녕, 오랜만..”
 

만날 수 없고, 나눌 수 없고, 소유할 수 없고, 느낄 수 없다 할지라도, 가끔 서로를 떠올리며 미소 짓고, 그리운 가슴을 쓸어내린다면, 그래서 함께 걸은 거리를 해매고, 함께 한 약속을 기억하고, 서로의 모습을 그리며 가슴앓이 한다면, 그것은 사랑일까? 소유하지 않아도, 전할 수 없어도, 나눌 수 없어도, 그것을 현실이 아닌 다른 세상에 둘 수밖에 없을지라도, 여전히 사랑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녀의 모습을 아름답고도 눈부셨다.
 

사랑이 현실이 되었을 때, 서로가 서로에 대한 감정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 잃어버릴 수 있는 그것을- 가슴속에서, 기억 속에서, 추억 속에서 하는 사랑은- 잃지 않을 터다. 어쩌면 현실과 타협하지 않기에 온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 사랑. 그것은 환상 안에서 더 완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영화의 엔딩은 그렇게 진한 여운을 남긴다. 그들의 사랑이 환상 속에서, 서로의 기억 속에서, 가슴 속에서, 해피엔딩이길 바라며-

 

 

 

 우리 아이,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세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은 아이에게 부모들은
내 새끼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그 말 이면에는 나의 것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아이를 낳아 본 엄마의 입장에서는 그 의미가 꼭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아이는 엄마와 아빠의 몸의 일부에서 생겨나 10개월 동안 같은 몸에서 하나의 몸에서 공생했으니 낳았어도 여전히 나의 일부인 것만 같은 생각. 그 생각을 공감하지 못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종종 그 생각이 지나쳐 아이를 하나의 객체로 인정하지 못 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마치 부모의 소유물인 양,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야지. 부모 말 안 들으면 나쁜 사람이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는 조금이라도 자신의 뜻과 어긋나는 아이의 모습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부모들을 볼 때면, 그들은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자신의 마음에 꼭 드는 밀랍인형이길 바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아이의 의사와 생각은 전혀 안중에도 없고, 자신의 바람과 생각을 그대로 수용해주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때때로 아이의 생각을 텅 비게 하거나 가슴을 조여 고통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

더군다나 우리 아이들은 자발적인 사고와 자발적인 선택을 극히 제한하는 교육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그들은 같은 교복, 같은 자세, 같은 내용, 같은 답에 익숙해져 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도 모른 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는 것이 두려워, 안 좋은 결과가 생기는 것을 두려워하며 숨죽이며 하루에도 반나절이 넘는 시간을 자신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학교에서 생활을 한다. 그런데 집에 와서도 부모로부터 끊임없이 잔소리를 듣고, 부모의 뜻에 맞추면서 살아가야 한다니, 그 속이 오죽하겠는가

아이는 부모와 전혀 다른 객체이고, 다른 감각, 다른 경험, 다른 생각을 바탕으로 성장하고 있다. 그것을 그들의 고유의 영역이라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그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없다. 물론 미성숙하고 판단이 미숙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걱정되고 염려되는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마치 자신의 소유물 취급을 하듯 표현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닌 구속과 억압이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랑을 가장한 구속과 억압은 아이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과 같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해야지. 저런 경우에는 저렇게 해야지.” 라는 당위적인 사고를 강요받고 자란 아이일수록 어떤 규칙이나 원칙으로부터 벗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런 불안감은 스스로 어떤 선택이나 결정을 했을 때, 일을 그르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작용하게 된다. 결국 지나친 간섭과 통제가 아이를 스스로 생각하지도 결정하지도 못 하는 상태로 만든 원인이 될 수 있고, 더 나아가 의존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나 반항하거나 거부하는 태도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부모는 아이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야 한다. 아이가 자신과 다른 생각과 다른 판단을 한다고 해서 그것을 견디지 못 하고 자신이 바라는 대로 바꾸려들지 말고, 있는 그래도 이해하고 수용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만약 당신의 아이가 자신의 뜻을 표현하지 못 한다면, 늘 주눅들어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지 못 한다면, 왜 다른 아이들처럼 주도적으로 자신 있게 살지 못 하냐고 책망할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 얼마나 많은 선택의 기회와 표현의 기회를 주었는지를 생각해 보고, 자신의 뜻보다 아이의 뜻을 먼저 존중해 주었던 적이 얼마나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와 부모의 뜻이 다를 때,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 가장 좋은 방법은 [나 대화법]이다. 아이의 입장과 아이의 생각과는 별개로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입장을 전달하는 방법이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몇 번 말했니?”가 아니라 엄마가 여러 번 이야기 했는데, 네가 같은 행동을 하니 엄마가 많이 속상하구나.”라고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자신의 입장에서 전달하는 방법이다. 부모가 먼저 [나 대화법]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아이에게 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표현하게 한다면, 서로의 감정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이해할 수 있는 첫 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다


 

"부모이기 전에 ‘나’로 존재하라!”



세계의 여성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무자식의 길을 선호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여성들 또한 결혼도 늦추고 있을 뿐 아니라 맞벌이를 하는 부부의 경우, 아이를 낳는 것 자체에 심리적인 부담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얼마 전 프랑스 심리학자인 코린느마이어는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할 40가지 이유>라는 책을 출판하여 숭고한 희생으로 포장된 모성의 신화를 비판하고, 여성이 아이 때문에 희생하고 잃어버리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그것을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사회가 여성에게 얼마나 강박적으로 주입하고 있는지를 신랄하게 분석했다.

여성 뿐 아니라 남성이 가장으로서 책임감도 막중해지고 있다. 청년층의 취업난과 결혼이 늦어져 새로운 가계를 꾸리는 비중이 줄어들다보니, 50~60대까지 가장으로서의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현상은 가구주 고령화로 나타나고 있다. 여성은 육아와 살림으로 인해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해야 하고, 남성은 경제적 책임으로 인한 노동의 시간동안 자신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조직의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현대의 젊은이들은 부모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것 자체를 회피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그 선택은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되는 길은 그 누구도 강요할 수 없고, 강요해서도 안 된다. 스스로가 선택하고, 계획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어디 인생이 계획대로만 흘러가는가? 그리고 살면서 얼마나 자발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설사 정말 부모가 되는 길을 원하고, 자발적으로 선택했다고 해도, 막상 부모가 되어보니 상상했던 것 이상의 힘들고 지난한 과정을 직면해야 할 수도 있다. 그 과정 속에서 종래에 경험하지 못 했던 경험을 통해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하기도 하고, 성장하고 발전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기도 한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이를 세상에 내놓고, 하나의 인격체로 성장시키도록 도와주는 부모의 역할은 수많은 역할 중에 가장 중요한 역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역할을 위해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자신이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않고, 오로지 부모의 역할에 집착하다보면 우리는 절대 행복해 질 수 없다. 그 이유는 집착을 하게 되면, 자식을 돌보고 자식에게 사랑을 주는 것이 유일한 기쁨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쁨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겨 자신의 자율성은 그 안에서 용해되고 만다.

희생만을 기쁨으로 아는 태도는 강박적인 자기 파괴적인 사랑으로 발전하거나 상대에게 예속되어 버리는 자학적인 사랑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높다” - 정신분석 전문의 김혜남

나는 이 말을 듣고, 우리네 어머님들의 삶이 떠올랐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고, 자신이 겪는 고통과 아픔을 아름답게 미화시켜야만 했던 그녀들의 삶.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자식들이 이루어주길 원하고, 늙고 힘없게 되었을 때는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키웠는데라고 원망하며 눈물짓는 그녀들. 남은 것은 되돌릴 수 없는 시간과 병들고 쇠약해진 몸 그리고 자식에게 의존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경제적인 무능함. 그녀들은 과연 행복하게 살아온 것일까? 그녀들은 진정 자식을 사랑한 것일까?

사랑은 물론 교환논리로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랑을 하게 되면 아주 기꺼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것을 내어주려고 한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준다는 것의 의미는 우리의 잠재력을 발휘하는 것이고, 우리의 능력과 힘을 과시할 수 있는 것이므로 진정한 생동감과 만족감을 주는 행위라고 이야기 했다.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해서 자신을 내어줌으로 인해 자신의 일부가 사라져버렸다면 그것은 자신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 전가시키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자신이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고,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 했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들을 온전히 자신에게 돌린다면 타인 혹은 상황의 책임까지 자신이 떠안게 되므로 불행해 질 수밖에 없고, 그렇다고 타인 혹은 상황의 책임으로 떠넘긴다면 피해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그러니 자신을 잃지 않고, ‘로서 존재할 때, 자신을 돌보고 사랑하면서 자신에 대한 책임을 다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신에게 소중한 가족들과도 건강하고 성숙한 사랑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부모들에게 이렇게 부탁하고 싶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어주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아낌없이 주더라도 나무는 나무로서 존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맨 처음 내 몸에 우리 아이의 모습이 콩알만 한 크기로 자리 잡았을 때, 그 때의 놀라움과 감격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그 작은 생명이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 씩 형태를 드러내며 변화를 시작할 때, 나 또한 분주하게 엄마 그리고 부모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결혼을 준비해야 했고, 내 몸에서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생명을 위해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안정을 위해 노력해야 했다.

10개월 동안 아이를 내 몸에 품고 있었던 시간동안, 내 몸의 주인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내 의지와 상관없이 변해가는 것이 혼란스러웠지만 아이의 움직임을 느끼고,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나눌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즐거웠다. 그 때는 내가 부모가 된 다는 것,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고 움직이며 살아가는 하나의 인격체를 세상에 탄생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8시간의 진통. 온 몸의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터져나가는 고통 속에서 오직 아이만을 생각해야 했던 시간들. 산모보다 몇 배 더 힘들 수 있다는 아이를 위해 사투를 벌이던 시간들. 그리고 그 고통의 끝에서 내 몸을 빠져나온 아이를 안았을 때, 그 때만큼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충만감과 행복감을 또 느낄 수 있을까? 아이를 나를 바라보았고, 웃었다. 그리고 나의 품에 들어와 나의 젖을 물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를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존재의 상태로 변모시키는 과정. 그 과정에서 부모가 해야 하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만큼 벅찬 것이었다. 매일 24시간, 나의 감각과 나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아이를 살피고 돌보며 적절하게 반응해야 했고, 나의 입장이 아닌 아이의 입장에서 세상을 이해해야 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시간동안 우리가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것은 바로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나와 다른 객체와 공감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부모에게는 아이를 사랑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능력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아이가 말을 하게 된 지금, 아이와 공감하고 소통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아이의 입장에서 세상을 이해하려던 노력이 나의 입장에서 세상을 이해하던 방식으로 아이를 교육시키려는 노력으로 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이가 하나의 인격체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아이는 나에게로부터 분리된 하나의 객체 가 될 수 있다. 내가 아닌 는 어떤 것에 의해서든 일치되지 않는 생각과 느낌에 의해 대립관계에 놓일 수 있다. 이제 아이와 분리되어 부모의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그런 불일치 상황, 대립 상황에서 아이와 소통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는 이유는 의 감각과 생각에 집착하고, 몰두하여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 뿐 아니라 대부분의 부모들이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 아이들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갈 때, 나는 그 고민을 나누고, 이해하고, 소통하고 싶어진다. 수많은 부모들이 당연히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겠지만 그 사랑하는 표현이 서툴고 상대가 받아들이기 힘든 방식이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닌 상처가 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부터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경험, 지식, 감정을 동원하여 비록 대단하지 않고, 전문적이지 않을지라도, [우리 아이 제대로 사랑하는 부모 되기]를 위한 칼럼을 쓰기 시작하련다. 그 글을 통해 나를 포함하여 더 많은 부모들이 자신과 아이를 제대로 사랑하며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이 부모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자신이 가진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깨닫고 세상을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전 1 2 3 다음